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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기록 2004. 4. 2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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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제국 인텔은 그냥 인텔이 아니었다. 인텔은 언제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였다. 그런 인텔이 이제는 ‘인텔 에브리웨어(Intel Everywhere)’를 부르짖고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모든 디지털 기기에 인텔 칩을 넣겠다는 계획이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위크’ 최신호는 인텔이 컴퓨터를 넘어 통신과 가전분야로 시장 영역을 확대하는, 35년 역사상 가장 야심찬 도전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올해 64세인 인텔의 CEO 크레이그 배럿이 이처럼 ‘마지막 배팅’에 나설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디지털 융합’이 지금 IT업계의 최대 화두이자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IT업계에서 디지털 컨버전스(융합)는 ‘유비쿼터스’ 만큼이나 중요한, 절대로 몰라서는 안되는 개념이 되었다.
삼성전자는 지난 99년 회사 창립 30주년을 맞아 21세기 디지털 리더 기업으로의 도약을 선언하는 ‘비전 선포식’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컨버전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모양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21세기 디지털 컨버전스 혁명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커나갈 것’이라며 ‘이를 위해 홈·모바일·퍼스널 멀티미디어와 반도체 액정을 비롯한 핵심부품 등 4대 전략 사업군을 집중 육성해 각 분야에서 세계 3대 업체로 부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언론은 물론 IT 전문가조차 디지털 컨버전스란 개념에 생소할 때였다. 당시 한 언론이 ‘디지털 컨버전스는 음성 데이터 영상 등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돼 사용이 편리해지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설명을 달았을 만큼 이에 대해 무지했다.

융합이 변화를 주도한다

‘디지털 컨버전스’는 하버드대학 비즈니스 스쿨의 데이비드 요피(David Yoffie)교수가 쓴 책 ‘디지털 융합 시대의 경쟁(Competing in the Age of Digital Convergence·하바드대 비즈니스 스쿨, 1997)’에서 그 개념이 처음 나왔다. 데이비드 요피 교수는 이 책에서 창조적 결합(Creative Combina-tion)을 컨버전스 환경의 으뜸가는 전략으로 꼽으면서 창조적 결합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데이비드 요피 교수의 예측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그로부터 6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를 거듭해 인텔이 최근 주관한 ‘2004 춘계 개발자 포럼(IDF)’의 제목이 ‘기술 융합이 기회를 창출한다(Converging Technologies, Growing Opportuni-ties)’가 됐다. 이 자리에서 크레이그 배럿은 기조연설을 통해 ‘디지털 기술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변화는 가전과 통신, 서비스간 융합이 주도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IT업계와 가전산업의 컨버전스로 인해 쏟아져 나오는 각종 디지털 컨버전스 기기들의 홍수를 쳐다보면 데이비드 요피 교수조차 자신의 말에 대한 ‘진행형 결과’에 대해 놀라고 있을 것이다.
컨버전스의 경이는 휴대폰 하나만 보아도 정말 실감이 난다.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나 PDA와의 결합만 해도 눈부실 지경인데, 최근에는 MP3 기능을 첨가한 소위 ‘MP3폰’이 나왔다. 게다가 응급상황에서 119를 호출하는 기능이나 리모콘 기능도 추가됐고, 당뇨와 스트레스 강도 등을 진단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헬스폰’도 곧 선보일 것이란 소식이다. 이쯤 되면 정말 휴대폰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휴대폰은 전화기인가, 카메라인가, 캠코더인가, PDA인가, MP3인가, 의사인가, 리모콘인가, 이동추적장치인가.

기술발전이 새로운 니즈 창출

전통적으로 새로운 기기의 발명과 이로 인한 문명의 탄생은 소비자들의 요구(needs)에서 출발한다.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부응해서 신제품이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전제품 진화의 역사는 그 자체가 가정주부들의 욕망사(慾望史)이다. 누가 밥을 대신 해주었으면, 빨래를 대신 해주었으면, 청소를 대신 해주었으면, 설거지를 대신 해주었으면 하는 욕구의 구현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전기밥솥, 세탁기, 진공청소기(청소로봇), 식기세척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접하게 될, 혹은 이미 접하고 있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새로운 문명은 이러한 고전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니즈’가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니즈’를 창출하는 것이다.

융합의 블랙홀 현실화

이같은 문명 생성의 역전 현상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신제품은 항상 소비자들의 욕구보다 앞서 달려가면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기 때문에,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제품의 트렌드를 쫓아가기 매우 어렵게 된다. 다시 말해 디지털 문명의 수혜에 있어 격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고, 이는 정보격차와 마찬가지로 매우 심각한 역기능을 가져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비만이나 건강을 관리하는 ‘사이버 웰빙시대’가 열리는 것이 단적인 예다. 앞으로는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면 어디서나 비만도, 체성분 등 몸 상태를 확인하며 전문가 조언에 따른 다이어트와 운동요법을 알아보는 건강관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곧 ‘닥터 용변기’도 등장할 전망이다. 이 용변기는 사용자의 대소변으로 그 사람의 혈당 수치나 콜레스테롤 수치 등 건강상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해 본인이나 의사에게 알려준다.
이처럼 각종 디지털 웰빙 기기를 항상 접촉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접근성 격차는 누가 더 건강하고 오래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사실은 디지털 융합의 속도가 가면 갈수록 빨라지고 그 범위도 확장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생명과학과 유전자 공학, 나노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융합의 블랙홀’에서 뒤섞이는 중이다.
‘테라의 시대(The Era of Tera)’가 열린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정보격차에 가속도를 붙이는 격이다. 테라는 10의 12승을 일컫는 단위다. 현재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처리속도는 최고 수준이 2.3㎓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유통되는 인터넷의 정보량은 53만2천8백97TB, 세계의 전화 통화량은 1천7백30만TB에 달하는 등 이미 ‘기가’의 시대를 넘어섰다.

공유와 나눔이 진정한 디지털 웰빙

이렇게 모든 것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다. 또 변해간다. 일반 사람들은 각종 디지털 문명의 가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헉헉거릴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의 인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리는 ‘5:95의 사회’에서 격차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따라서 정보격차와 디지털 격차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보자고.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회를 선진 문명사회로 인정하지 않듯 정보에 뒤쳐진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없는 사회를 디지털 문명사회라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디지털 격차를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작금의 디지털 컨버전스가 추구하는 참 웰빙의 모습이 아니다. 국가경쟁력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크나큰 손해를 자초하는 길이다. 진정한 ‘디지털 웰빙’은 역시 공유와 나눔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출처 : 경영과 컴퓨터[200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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